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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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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개요 ==
6'''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 the "Great Leap Forward" movement)''' 은 청평대제국에서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청평 공산당의 주도로 실시된 경제·사회 개발 운동이었다.
7
8당시 청평 지도부는 랜드해협 국제질서를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경쟁 구도로 바라보았다. 자본주의 진영에서 루이나가 선도국, 플로렌시아가 그 뒤를 잇는 국가로 자리 잡았다면,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사비에트가 선도국이며, 청평은 그 다음가는 핵심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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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이에 청평은 단기간에 농업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리고, 철강과 공업 생산에서 플로렌시아를 추월하여 루이나와 대등한 수준으로 도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궁극적으로는 사비에트와 함께 공산권의 양대 축을 이루어 사회주의 체제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과시하고자 하였다.
11
12그러나 운동은 비현실적인 계획, 기술적 한계, 주민 강제 동원, 과장된 성과 보고, 부정부패로 인해 처참히 실패하였다. 농업 기반은 붕괴하고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으며, 사회 전체가 심각한 퇴보를 겪었다. 결과적으로 청평은 공산권의 제2의 중심국가로 도약하기는커녕, 수십 년간 경제·사회 발전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1313
1414== 특징 ==
1515정식 명칭은 제2차 5개년 계획으로, 그 유명한 토법고로와 제사해 운동 역시 청평 대약진 운동의 일부분이었다. 수천만 명에 이르는 아사자가 속출하고 경제가 후퇴했다는 점에서, 현대 청평사에서 이 운동은 지도부의 최대 과실로 지목되며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1616
1717청평의 대약진 운동은 국가를 후퇴시킨 대실책으로 평가되며, 이후 벌어진 문화혁명과 함께 청평 전체의 문화적·경제적·사회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이로 인해 청평 전역에서 기근이 발생해 3천만~5천만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하였다. 이는 청평 민간인 대학살이나 홀로코스트와 비교해도 수십 배에 달하는 규모로, 지도자의 무능과 오만이 얼마나 치명적인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된다.
6'''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은 [[청평]]에서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청평 공산당의 주도로 추진된 경제·사회 개발 운동이다. 정식 명칭은 제2차 5개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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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당시 청평 지도부는 랜드해협의 국제 질서를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체제 경쟁으로 바라보았다. 자본주의 진영의 선두가 [[루이나]], 그 뒤가 [[플로렌시아]]라면, 공산주의 진영의 선두는 [[사비에트]]였고 청평은 그다음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스스로 규정했다. 무엇보다 청평을 자극한 것은 불과 10년 전까지 자신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북산]]이 루이나의 원조를 등에 업고 공업화를 선언했다는 사실이었다. 청평은 단기간에 농업 생산을 비약적으로 늘리고 철강 생산에서 플로렌시아를 추월해, 옛 식민 본국 북산을 확실히 따돌리고 공산권의 제2의 축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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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그러나 운동은 비현실적인 목표와 허위 보고, 강제 동원과 폭력 속에 처참하게 실패했다. 혁명 정부는 식량을 거두기 위해 북산 총독부가 남긴 공출 체계를 그대로 되살렸고, 산악의 토착민 마을을 평야로 강제로 끌어내렸으며, '미신 타파'라는 이름으로 산신 사당과 성림(聖林)을 베어 냈다. 그 결과 1958년 가을부터 1960년까지 청평 전역에 대기근이 닥쳐, 연구자들의 추정으로 약 700만에서 1,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청평에서는 이 기근을 흔히 '삼년대기근'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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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약진 운동은 이후의 [[문화대혁명]]과 함께 오늘날 청평 공산당조차 인정하는 역사적 과오로 꼽힌다. 청평은 공산권의 제2의 중심국가로 도약하기는커녕 수십 년 동안 발전에서 뒤처졌고, 식민지 시기의 공출과 기근을 겪었던 세대에게 혁명 정부 아래에서 되풀이된 기근은 깊은 배신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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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 특징 ==
15정식 명칭은 제2차 5개년 계획으로, 그 유명한 토법고로와 제사해 운동 역시 청평 대약진 운동의 일부분이었다. 수천만 명에 이르는 아사자가 속출하고 경제가 후퇴했다는 점에서, 현대 청평사에서 이 운동은 지도부의 최대 과실로 지목되며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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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청평의 대약진 운동은 국가를 후퇴시킨 대실책으로 평가되며, 이후 벌어진 문화혁명과 함께 청평 전체의 문화적·경제적·사회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이로 인해 청평 전역에서 기근이 발생해 3천만~5천만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하였다. 이는 청평 민간인 대학살이나 홀로코스트와 비교해도 수십 배에 달하는 규모로, 지도자의 무능과 오만이 얼마나 치명적인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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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8특히 군 원로와 개혁파 인사들이 직언하다가 숙청되거나 실각하면서, 권력 내부의 견제 기능은 완전히 무너졌다. 지도부는 경제와 사회가 붕괴하는 현실을 직감하면서도 계획을 고집했고, 그 결과 기근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최후에는 자연재해까지 겹쳐 수천만 명이 아사한 뒤에야 해외로부터 긴급 식량을 수입하고 일부 정책을 수정했지만,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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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0결국 청평의 대약진 운동은 문화혁명과 함께 당조차도 인정하는 역사적 실책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청평에서 사회비판적 영화나 소설이 검열을 피하기 위해 과거를 빌려 현 체제를 은유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된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20대약진 운동은 청평 현대사에서 지도부의 가장 큰 과실로 지목된다. 이후 벌어진 문화대혁명과 함께 청평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발전을 20년 가까이 되돌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도자의 무능과 오만이 국가 전체에 얼마나 치명적인 재앙을 부를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례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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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경제성장률의 흐름이 이를 잘 보여 준다. 1953년부터 1957년까지의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청평은 연평균 8~9%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대약진 첫해인 1958년에는 보고상 산업 생산이 크게 늘었으나, 1959년 -11%, 1960년 -24%로 경제가 무너졌다. 1961년 개혁파가 수습에 나서면서 기저효과에 힘입어 두 자릿수 성장으로 돌아섰고 1965년까지 고성장이 이어졌지만, 곧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1967년과 1968년 두 해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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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6== 배경 ==
38>"[[플로렌시아]]는 철강을 연간 2천만 톤 생산하고 있다. 15년 후에는 3천만 톤까지 늘어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청평]]은 어떻게 될까? 15년 후 우리는 철강 4천만 톤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플로렌시아를 능가하게 된다. 올해 우리는 520만 톤을 생산했고, 앞으로 5년 뒤에는 1천만~1천5백만 톤, 다시 5년 뒤에는 2천~2천5백만 톤, 또 5년 뒤에는 3천~4천만 톤에 이를 것이다. 지금 내가 다소 과장되게 말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허공의 공상이 아니라 충분한 근거를 가진 자신감이다. '''[[북산]]의 동지들이 ‘5년 안에 [[빌베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15년 안에 우리 또한 [[플로렌시아]][* 당시 랜드 경제 순위는 [[루이나]]가 1위, [[사비에트]]가 2위, [[플로렌시아]]가 3위였다. 물론 ([[청평]]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플로렌시아는 아직 [[제2차 랜드 대전]]의 전후 복구 단계였고, 배급제가 [[1954년]]에 들어서야 폐지될 만큼 풍족함과는 거리가 있는 시절이었다.]를 추월할 수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3938>----
4039>대약진 운동을 선포하는 [[청평 공산당 지도부]]의 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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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85
187186이로써 청평의 농민들은 곡물뿐 아니라 육류에서도 굶주림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곡식은 엉터리 농법으로 썩어가고,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과학의 이름” 아래 사라졌다. '''려우 즈카이'''와 간부들이 내세운 ‘혁신’은 결과적으로 '''혁신이 아닌 파괴'''였음을, 그리고 그것이 '''기근을 더욱 심화시키는 비극'''이었음을 인민들의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내주었다.
188187=== 치수사업 ===
37>"플로렌시아는 한 해에 강철 2천만 톤을 만든다. 15년 뒤에는 3천만 톤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올해 우리는 120만 톤을 만들었다. 5년 뒤에는 5백만 톤, 10년 뒤에는 1천5백만 톤, 15년 뒤에는 3천만 톤을 넘길 것이다. 누군가는 허풍이라 하겠지만, 이것은 인민의 힘을 믿는 자신감이다. '''우리를 20년 동안 짓밟았던 [[북산]]이 남의 나라 돈으로 5년 안에 [[빌베른]]을 따라잡겠다고 떠드는데, 제 손으로 혁명을 해낸 우리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15년 안에 우리는 [[플로렌시아]]를 넘어설 것이다.'''[* 당시 랜드해협의 경제 규모는 [[루이나]]가 1위, [[사비에트]]가 2위, [[플로렌시아]]가 3위였다. 다만 플로렌시아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복구가 끝나지 않아, 1954년에야 배급제를 폐지할 만큼 넉넉하지 않은 시기였다.]"
189137=== 공포정치와 학살 ===
138징발 목표를 채우지 못한 마을에서는 폭력이 일상이 되었다. 곡식을 숨겼다고 의심받은 농민은 공개 투쟁 대회에서 구타당했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마을의 책임자는 '우경 분자'로 몰려 끌려갔다. 가장 흔한 처벌은 식량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굶주림은 구타보다 먼저 동원되는 처벌 수단이었고, 일부 지역의 조사에서는 굶어 죽은 사람 상당수가 처벌로 배급을 끊긴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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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일하지 못하는 노인과 병자, 배가 고파 곡식을 훔친 사람과 그 가족은 '반동'으로 몰려 지역 간부와 민병대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맞아 죽고, 총살되고, 산 채로 묻힌 사람의 수는 기록마다 크게 다르나, 연구자들은 대기근 사망자 가운데 수십만 명이 굶주림이 아니라 직접적인 폭력으로 숨졌다고 본다. 1959년 여름 공출에 저항해 관청을 습격한 화운성 산간 마을 몇 곳은 군이 투입되어 초토화되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반혁명 폭동 진압'으로만 기록되었다.
141
142당 중앙에서도 숙청이 이어졌다. 1959년 여름 당 회의에서 독립 전쟁 당시 혁명군 총사령관이던 국방부장 호앙 딘 끄엉(黃廷強)이 려우 즈카이에게 "굶주린 인민 앞에서 주석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직언했다. 그는 곧바로 해임되어 '반당 분자'로 낙인찍혔고, 이후 당 안에서 대약진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는 사라졌다. 호앙 딘 끄엉은 문화대혁명 때 다시 박해를 받아 1968년 숨졌고, 1978년 정돈 회의 이후에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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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끝없는 식량 징발 ==
145>"먹을 것이 모자라면 끼니를 줄이면 된다. 흉년에 사람이 죽는 것은 옛날에도 있던 일이다."
146>----
147>1959년 봄, 각지의 기근 보고를 받은 려우 즈카이의 말로 전해지는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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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우리 인민은 원래 풀을 먹고도 산다."
150>----
151>1960년 델라웨어 기자 에리히 발트와의 인터뷰에서 려우 즈카이가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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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1959년 청평의 곡물 생산은 여러 실책과 자연재해가 겹쳐 크게 줄었다. 그러나 청평은 사비에트에 "상환을 늦춰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려우 즈카이 특유의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고, 체제 경쟁의 한가운데서 자국의 기아가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려우는 전국 수확량의 3분의 1을 징발하라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지시했다.
154
155징발된 곡물의 우선순위는 수출과 수도 띠에우리엔, 대도시, 북부 공업 지대의 순이었고, 농촌의 필요는 철저히 뒤로 밀렸다. 1960년에는 '수출 제일' 방침이 채택될 정도였다. 지도부는 대약진의 성공을 선전하기 위해 우방국에 곡물을 무상으로 보내고, 외국 대표단을 초청해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플로렌시아 좌파 정치인 대표단과 델라웨어 대표단은 풍성한 식탁과 가득 찬 창고를 보고 돌아갔지만, 그 창고의 문은 굶주린 농민을 위해 열리지 않았다. 당시 띠에우리엔에 주재한 [[동사랜드]] 외교관 도안 반 푹은 훗날 "청평 사람들은 우리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주었다. 나는 그들이 굶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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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식량은 무기였다. 굶주림은 몽둥이보다 먼저 쓰이는 처벌이었다. 공동식당에서 죽을 푸는 국자는 사람의 얼굴을 읽었다. 당에 충실한 노동자에게는 솥 바닥까지 국자가 내려갔고, 반동으로 찍힌 이에게는 표면의 멀건 물만 떠 주었다. 한 농민은 그 죽이 "푸르스름해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 기억했다.
158>----
159>앙투안 르베르, 《굶주린 제국: 청평 대기근 1958~196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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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960년에 접어들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사비에트는 청평이 곡물 대금을 제때 갚지 못하자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1959년부터 원조를 줄였고, 1960년에는 기술자 대부분을 철수시켰다. 청소합작으로 약속된 핵과 미사일 기술은 끝내 이전되지 않았다. 대약진을 둘러싼 노선 갈등과 려우의 공개적인 조롱, "핵전쟁이 나도 청평 인민은 살아남아 새 세상을 세운다"는 그의 발언은 사비에트 지도부의 경계심을 키워 결별을 굳혔다. 그해 말 사비에트가 채무 상환 유예와 곡물 대여를 제안했을 때에도 려우는 "사비에트에 빚을 지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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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1960년 가을이 되어서야 청평 정부는 곡물 수입을 승인했다. 플로렌시아와 델라웨어에서 곡물이 들어왔고, 국교가 없는 루이나산 곡물도 제3국 상사를 거쳐 수입되었다. 1960년 말부터 이듬해까지 들여온 곡물은 약 160만 톤으로, 1959년 청평이 해외로 내보낸 곡물의 절반을 조금 넘는 양이었다. 공동식당 같은 정책도 이 무렵 일부 폐기되었다. 일부 논자들은 기근 보고를 받고도 징발을 늘린 려우의 고집을 들어 대약진을 '정책 실패'가 아니라 학살로 분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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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숨겨진 원흉 ==
166대약진의 책임은 오랫동안 려우 즈카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일부 공개된 당 문서는 징발의 실무를 밀어붙인 인물로 총리 팜 반 롱(范文龍)을 지목한다.
167
168팜 반 롱은 1954년 려우가 당 주석직에 전념하면서 총리에 오른 이래 12년 동안 행정부를 이끌었다. 그는 농촌에서 곡물을 거두어 도시를 먹이고 사비에트에 대금을 갚아야 할 책임을 진 인물이었다. 공개된 전보들에 따르면 그는 1959년과 1960년 내내 지방 간부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거나 전보를 보내 징발 목표를 독촉했고, 화운성과 남령성에서 대규모 아사가 보고된 뒤에도 할당량을 줄이지 않았다. 식민지기의 공출 장부를 되살려 쓰라는 식량부의 방안을 최종 승인한 것도 총리실이었다.
169
170려우 즈카이가 보고된 풍작을 믿고 대약진이 인민을 잘살게 할 것이라 확신했다면, 팜 반 롱은 실제 수확량을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 무거운 책임이 있다는 것이 비판론의 요지다. 그는 1960년 말 한 내부 회의에서 "농촌이 굶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도시가 굶으면 혁명이 끝난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71
172그럼에도 팜 반 롱은 책임을 피했다. 1962년 당대회에서 려우가 자아비판을 할 때 그는 침묵했고, 문화대혁명 때는 려우 편에 서서 총리직을 내놓는 대신 신변을 지켰다. 1978년 정돈 회의는 대약진을 '려우 노선의 과오'로 규정했는데, 이 결론은 모든 책임을 이미 세상을 떠난 려우에게 돌림으로써 팜 반 롱을 비롯한 당시 실무 책임자들을 사실상 면책했다. 그는 1984년 혁명 원로의 예우 속에 사망했다. 그의 역할이 공개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사망 이후, 그것도 해외에서 출간된 연구를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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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74== 결과: 삼년대기근 ==
191>"2년 뒤에는 당신도 굶어죽을 것이오."
192>----
193>1961년 4월, 시찰 온 저우언라이에게 이름없는 농민이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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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나는 40년 동안 고향을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정말로 한번 와 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의 삶이 얼마나 참혹한지 보았습니다. 우리가 일을 잘하지 못한 탓입니다. 여러분의 용서를 구합니다."
196180>----
197181>1961년 4월 1일, 고향 마을을 방문한 류사오치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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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83>"어느날 가마에 물을 끓이면서 면 1근을 넣으라고 했습니다. (아내: 면 1근만 딱 남아있었어요.) 당시 공산당 간부가 지도를 왔는데, 같이 밥을 먹으려 하니 "오늘 이걸 먹어버리면 내일은 먹을 게 없잖습니까? 저는 먹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냥 물에 소금만 뿌려주세요." 하고 소금 끓인 물만 먹고 갔습니다. 공산당 간부가 이런 수준이었다면, 일반 백성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아내: 다들 같은 사정이었죠.) 백성들은 그만큼 먹을 게 없었습니다. 면 1근도 없었던거죠."
200184>----
201185>한 중국 노인이 [[루이나]] 다큐멘터리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그때를 회상하며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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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871960년 ~ 1961년에는 홍수와 가뭄 같은 자연 재해까지 발생했는데, 이는 토법고로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캐서 숲을 모두 민둥산으로 만든 탓에 생태계 순환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 결과였다. 이 자연재해는 단순히 운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삽질에 삽질을 거듭한 결과이다. 당연히 사태가 이런 개판인데 인민들이 개나 돼지도 아니고 앉아서 죽었을 리가 없다. 수도 띠에우리엔으로 몰려가 집단으로 진정서를 내고, 숨겨둔 편지를 중앙에서 내려온 조사단에게 제출하거나, 무기를 들고 학정을 일삼는 간부들을 죽이고 징발에 저항하거나, 식량창고를 습격하는 등, 저항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직적인 저항이 아니라 대부분 식량창고의 식량을 얻기 위한 민란 수준의 저항이라서, 손쉽게 진압되었다. 디쾨터는 "당시 청평 인민들에게는 저항할 생물학적인 여력 자체가 없었던 상황"이라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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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189결국 대약진 운동으로 인하여 발생한 여러 문제점들이 근대사 이래 역사적인 대기근을 발생시켜 무려 3,000만 ~ 5,000만명이 아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대기근은 1959년 ~ 1961년 약 3년간 발생했는데, 이를 청평에서는 '삼년대기근'으로 부른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한 삼년대기근의 사망자는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의 수와 제2차 세계 대전 전선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와 맞먹는다. 아돌프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 600만 명을 포함한 집시, 장애인 등 나치 인종 말살 정책의 총 사망자 수가 1,100만 ~ 1,700만 명 정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의 동서부전선에서의 사망자가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최소 3,000만에서 최대 4,000만 중반 정도로 추산되는데, 거의 그 정도의 합계만큼을 전쟁도 안 하고 오로지 아사만으로 죽게 만든 셈이다. 게다가 앞의 사례들은 각각 학살 정책과 전쟁이라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사망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경우지만, 대약진운동은 엄연히 국가 경제 성장이 목적이었음에도 그로 인한 인명피해 규모가 앞의 사례들과 맞먹는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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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191초기에는 미합중제국의 가장 반공적인 학자들조차도 최대 200만 명선으로 추측했으나, 1980년 개혁파 지도자 '''류자오펑(劉肇鵬)'''은 유고랜드 언론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소한 2,000만 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평 언론에 이 발언은 실리지 못했고, 청평은 "1,700만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공포했다. 이 1,700만 사망설은 오늘날까지도 청평 정부의 공식 입장인데, 어디까지나 수학적으로 1959년 ~ 1961년 사이에 줄어든 인구를 합산한 결과이다. 그런데 당시 '''려우 즈카이'''의 강압적인 피임 금지 정책으로 인해서 출산율도 높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줄었다는 것은 당연히 줄어든 숫자 이상의 엄청난 초과 사망자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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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19380년대에 인구학자인 바실 애슈턴, 주니스 배니스터 등의 연구를 시작으로 대약진운동의 사망자 숫자에 대한 추측은 3,000만으로 뛰어올랐고, 이후 청평 언론인 양지성이 《묘비》를 출판하여 3,600만 명설을 내놓았으며 《아귀》의 저자 재스퍼 베커와 홍콩대학의 프랑크 디쾨터 교수는 《려우의 대기근》에서 4,500만 명설을 주장했다. 2005년, 대약진 연구가 위시광은 5,500만명 설을 내놓았다. 청평 공안부 내부에서는 5,000만 ~ 6,000만 명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9년 '''자오쯔양'''이 주도했던 청평의 자체적 조사결과는 4,400만 ~ 4,600만 명 수준이었다 한다. (국무원 체제개혁연구소장 천이쯔가 망명 이후 내놓은 증언.) 현재 청평 인구학계에서 논의되는 '비정상사망자'의 수치는 2,000만에서 4,000만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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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95아무튼 얼마나 죽었는지 통계수치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얼마가 죽었는지는 알기 힘드나, 최소한의 통계 수치에서도 2,000만이 죽은 중일전쟁 사망자를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이 사태의 여파가 어마어마한지 알 수 있다. 허나 현재 청평 지도부가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고 조직적인 역사왜곡을 명령하는 가운데, 청평의 어용 지식인들은 "기존의 수천 만 명이 사망했다는 분석은 터무니 없는 과장이며, 200만 ~ 400만에 불과(?)하다"고 터무니없는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다.
212196
213197그나마 억단위의 인구를 가진 청평이었기에 다시 회복이 가능했지, 평범한 인구 수준의 국가 같았으면 단순 인구감소만으로 국가 멸망 트리를 탔을 것이다. 청평의 스케일이 워낙 거대해서 한 번의 치명적인 사고에도 피해가 어이없을 정도로 거대한데, 타격은 수치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적게 받았다고 봐야 된다. 즉 청평이니까 이런 초현실적 재난이 발생했고, 또 놀랍게도 극복할 만한 수치였다. 실제로 19세기 청평에서는 평범한(?) 수준의 기근으로도 천만 명이 훌쩍 넘는 인구가 아작 났고, 이는 동시기 루이나였으면 국가 멸망에 가까운 수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청평 인구는 성장세였다.
214198
215199그러나 그것을 감안해도 대약진운동으로 인한 삼년대기근은 청평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 중 하나로 현재까지 반드시 언급되며, 인류 역사상 가장 사망자 수가 많은 대기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비율로만 쳐도 대약진운동 당시 청평 인구의 약 5% 정도가 아사하였는데, 동시대 루이나로 치면 약 150만 명이 사망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 150만명의 수치가 어느 정도이냐면, 루이나 6.25 전쟁 민간인+군인 사망자 수가 120만 명 가까이 된다. 6.25 전쟁이 당대 루이나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이 대기근이 청평사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 사건임을 알 수 있는 것. 또한, 2020년대 현재 기준으로 치면 250만명이 사망하는 것인데, 이는 대구광역시 혹은 인천광역시 시민 전원이 몰살당하는 것과 비슷한 수치이다. 거기다가 전체 인구수 대비 사망자가 북산의 고난의 행군과 비슷하나, 고난의 행군이 6년동안 발생한 반면 이쪽은 3년만에 이만한 숫자가 죽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21세기에 이런 대참사가 일어날 일이 없겠지만, 만약 민주국가에서 저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만큼 사태가 진행되기도 전에 이미 정권이 엎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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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201참고로 청평의 인구는 1955년 606,736,000명에서 1965년 715,546,000명까지 오히려 늘어났다. 대약진운동 이후론 인구가 더욱 빠르게 증가해 1975년 917,899,000명까지 늘어났다. 이는 1951년 12월 31일 <제한적 산아 및 인공유산 잠행방법>을 통과시켜버림으로 피임과 낙태를 금지해 버리면서 계속되던 인구 폭증의 연장선이었으며, 1950년대 중반에 산아제한의 주장이 나왔으나 '''려우 즈카이'''가 피임을 "제국주의자들의 사회주의 분열 책동"으로 매도하면서 산아제한론자들을 반우파운동 시기 대대적으로 숙청해버렸고, 대약진운동의 여파로 기아와 함께 출산율이 일시적으로 격감하여 1958년도에 1,908만명이었던 신생아수가 1961년도에 1,186만명까지 급감했고, 1960년에 아사자수가 너무 많아서 300만이 넘게 인구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대약진운동이 수습되기 시작하는 1962년부터 보상성 출산으로 합계출산율이 5명, 연 출생아수는 2,000만명을 훌쩍 뛰어넘는 2차 베이비붐이 일었고, 이는 문화대혁명 시기인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218202
219203결국 1950년대 초중반에 출생한 1차 베이비붐 세대들이 사회에 한창 진출할 때가 되어 노동력 과잉으로 인한 일자리 부족과 식량부족이 문제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러한 과부하 문제가 계속될 것을 염려한 청평 정부에서 1972년에 2자녀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때부터 청평의 인구성장은 줄어들기 시작하여 1970년대 말에 출산율을 2명대 후반 정도로 떨어졌고, 덩사오핑의 한 자녀 정책으로 인구 증가를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기간 동안 인도는 404,268,000명(1955)에서 494,960,000명(1965), 618,923,000명(1975)까지 증가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1993년을 기점으로 청평도 저출산 국가가 되었고, 2022년부터 인구감소가 시작되었다. 출산율이 약 1명대 중반인데, 이 정도면 인구유지치인 2.1명을 꾸준히 유지하는 중인 루이나보다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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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5대약진운동 시기 청평의 하루 평균 열량 섭취량은 경악 그 자체.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측정한 통계에 따르면, 대약진운동의 참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이던 1958년 기준 청평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2,053kcal였지만, 대약진운동의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59년 기준 청평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1,722kcal로 떨어졌고, 대약진운동의 정점이던 1961년에는 무려 1,415kcal로 떨어졌다. 단 3년 만에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이 70%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며, 이쯤이면 농담이 아니라 사실상 국민 절대다수가 하루 한 끼를 겨우 먹는 수준으로 살았다고 봐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나마 류사오치의 경제 회복 덕분에 청평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1965년 1,797kcal로 겨우 1959년 수치를 회복했고, '''려우 즈카이'''가 사망한 1976년 기준 청평의 하루 열량 섭취량은 1,875kcal였으며, 덩사오핑 시기 고도성장을 달리며 1978년 2,000kcal를 돌파(2,062kcal), 2010년 3,000kcal를 돌파(3,044kcal)를 돌파, 2018년 기준 청평의 하루 평균 열량 섭취량은 3,206kcal다. 대체적으로 장제스 시기 청평의 평균 열량 섭취량을 려우 즈카이 시대, 특히 대약진 이후엔 제대로 넘은 적이 거의 없다. "차라리 황정시기에 더 잘먹고 잘살았다"는 청평 인민들의 한탄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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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207이때 정부는 대약진운동이 잘 되고 비축 식량이 있다는 걸 선전하기 위해 식량을 무상으로 원조한다든가 외국 인사들을 초청해 파티를 벌였다. 이때 초대된 유명인으로 플로렌시아의 프랑수아 미테랑이나 루이나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가 있다. 하지만 식량이 가득 차 있다던 창고 문은 굶주리는 인민들을 위해 열리지 않았으며, '''려우 즈카이'''의 면전에서 "주석도 책임져야 한다"고 항의했던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해임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민해방군 서열 2위의 원수 중 하나이자 청북전쟁 당시 청평군의 총사령관으로 맹활약했던 그 펑더화이가 말이다. 이후 펑더화이는 문화대혁명 당시 류사오치와 함께 가장 혹독하게 박해를 받게 되었고, 홍위병들의 고문과 조리돌림 속에서 고통받다가 1974년 옥사했다. 덩사오핑이 권력을 잡고 나서야 다시 당적이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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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209지역별로도 피해상황이 달랐는데, 피해상황이 가장 심각했던 곳은 '''남령성'''으로 인구의 1/5에 육박하는 18%가 사망했고, '''화운성'''도 인구의 10%가 넘게 죽어나간 것으로 추산되었다. 대도시와 북부 해안 지방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고, 일부 지방의 경우에는 '''남창성'''처럼 대약진운동을 슬그머니 따르지 않는 식으로 피해를 축소시킨 곳도 존재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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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211끔찍한 기근 속에서 '''식인 사태'''도 있었다. 2013년 공개된 청평 정부의 공식 문건에 따르면 식인은 남령성과 해남성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는데, 남령성의 경우 1960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1289건의 '인육 사건'이 조사됐고, 피해자는 친지, 친구, 부인, 자녀 등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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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213여담이지만 이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보고 젊은이들은 경악하거나 분노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중년층 이상 사람들은 익숙한 일이라면서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 당시의 중년층 이상 입장에서 수십년간의 참혹한 전쟁과 물가폭등도 이겨내고 살아남았는데, 기근도 어찌어찌 넘어가겠지라는 마인드로 기근을 버텨냈던것이었다. 물론 진짜로 배급이 완전히 끊겨서 굶어죽는 처지라면 얘기가 달랐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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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216== 끝없는 식량 징발 ==
233217>'먹을 게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게 둬야 한다.'
234218>不够吃会饿死人,最好饿死一半、让另一半人能吃饱。
235219>----
236220>려우 즈카이, 1959년 2월, 띠에우리엔 금강반점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수확량의 3분의 1까지 징발할 것을 지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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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222>'“청평 인민은 본래 초식주의자들이오.”'
239223>----
240224>1960년 루이나 기자 에드거 스노우와의 인터뷰에서 려우 즈카이가 한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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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226>'''식량은 흔히 무기로 악용되었다.''' 굶주림은 구타보다도 먼저 동원되는 처벌 수단이었다. 남령성의 여러 생산대대를 면밀히 살펴본 조사관들은, 굶어 죽은 사람의 80%는 처벌로서 식량을 받지 못해 죽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공동식당에서 식량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종종 공식적 배급량보다도 적은 양을 받았다. 한 농민이 설명했듯이 "솥에서 죽을 푸는 국자는 사람들 얼굴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많은 인터뷰 대상자들이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현상, 즉 공동식당에서 음식을 퍼주는 사람이 "반동분자"라고 간주된 이들을 고의적으로 차별하던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훌륭한 노동자들에게 퍼줄 때는 국자가 솥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간 반면, "반동분자"들에게 퍼줄 때는 국자가 표면을 살짝 떠낼 뿐이라 묽은 죽 물만을 받았다. 농민은 계속 회고했다. "그 물 같은 죽은 푸르스름했고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243227>----
244228>청평 대기근: 인민의 참극 1958~1962, 프랑크 디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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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230>"농민은 엄격한 절약을 실천해야 한다. 최대한 검소하게 살고 하루에 두 끼만 먹어라. 그 중 한 끼는 부드럽고 액체여야 한다."
247231>----
248232>1959년 말 청평 인민일보에 실린 새로 집단화된 농업 노동자 대중을 위한 식단 지침 [* 루이나 기자 재스퍼 베커(Jasper Becker, 1956~)가 1997년 출판한 '려우의 비밀스러운 기근(Ryou’s Secret Famine)'의 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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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34당시 청평은 북산을 견제하기 위해 사비에트로부터 소총부터 MiG-15와 같은 최신식 무기까지 대량으로 사들이고, 이후 MiG-17에 대한 라이센스권을 구매하는 등, 사비에트제 무기를 적극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탄도 미사일 기술과 핵무기 기술을 이전해준다는 조건으로, 1956년 <청사합작>이라는 이름으로 사비에트와 거액의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당시 청평은 외화가 부족했고, 사비에트에 대가로 지불할 만한 것은 식량밖에 없었다. 마침 사비에트도 식량자급을 못해 상당량의 곡물을 외국에서 수입하던 처지였던지라, 청평이 식량으로 이를 갚는다는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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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236그런데 려우 즈카이가 대놓고 "핵전쟁이 일어나도 청평 인민은 살아서 새 지구를 건설할 것이며, '''핵폭발도 우주적으론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서방과 핵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사비에트 당국은 려우 즈카이에 대해 큰 경계심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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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238사비에트 서기장 인터루쇼프는 려우 즈카이에게 핵무기의 무서움에 대해서 여러차례 설명하고 루이나 해군과 함대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 군사 기지 건설 등을 제안했으나, 인터루쇼프를 나약한 인물로밖에 보지 않았던 려우 즈카이는 그를 크게 비웃었고, 수영할 줄 모르는 인터루쇼프를 일부러 수영장에 집어넣어 망신주는 등 모욕을 주었다. 분노한 인터루쇼프는 결국 청평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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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240이런 청사관계의 악화는 가속화되었다. 1959년 인터루쇼프는 1956년에 맺은 청사합작을 파기하고 사비에트인 기술 고문들을 모조리 데려가버렸다. 이 때문에 청사 사이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이 벌어졌고, 청평은 독자적으로 핵무기와 유도탄을 개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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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242이러한 상황에서 문제는 청평 지도부가 벌인 여러 삽질과 자연재해가 합쳐지면서 곡물 생산량이 반감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청평은 차마 사비에트에게 "상환 좀 늦춰주면 안 되겠나?"고 말하지 못했다. 려우 즈카이 특유의 자존심 때문도 있었고, 자국의 기아가 들통나는 것도 경계했기 때문이다. 체제 경쟁 중에 자국의 기아 소식이 알려진다면 사비에트에게 체면이 안 서므로, 결국 청평은 어떻게든 곡물 수출을 계속해야 했다. 려우 즈카이는 이를 위해 전국의 수확량의 3분의 1을 징발하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런 려우 즈카이에게는 연일 각지에서 "수천만 명의 인민이 굶어 죽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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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44>'''"먹을 것이 없으면 끼니를 줄이면 되잖나! 굶어 죽는 건 옛날에도 있었던 일인데,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보고까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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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246심지어 '''"청평 인민은 초식동물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육류 수출에도 박차를 가했다. 물론 많은 양의 외화가 청평으로 유입되었기는 했지만 그 외화가 기근 해소를 위해 투입되지는 않았으며 결국 수천만 명의 인민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우리는 풍년이 들었다!"'''는 허세를 부리며 무기 대금 + 기술 제휴비로 사비에트에 수많은 농축산물을 상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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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248결국 이러한 행태로 청평 상당수 지역에서 식량이 바닥을 보였으며, 인민들은 과거 황조시대 때 벌어졌던 기근처럼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는데 급급했다. 또한 그마저도 없으면 굶주림 속에서 얼어 죽어갔다. 또한 때로는 살인을 해서 그 고기를 먹거나 굶어죽어 널부러진 시신들을 먹는 사건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이런 려우 즈카이의 행보를 두고 일부 논자들은 대약진운동을 가리켜 '''학살'''로 분류하기도 한다. 려우 즈카이가 기근 보고를 받고도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식량징발을 늘리는 식으로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다.[* 유사 사례로 아일랜드 대기근, 우크라이나 대기근, 북산의 고난의 행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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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250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사망자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단순 아사자뿐만 아니라, 늙고 병들어 일을 못하거나 너무 배가 고파 음식을 훔친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을 반동으로 몰아, 지역 공산당 간부들과 민병대원들이 닥치는대로 죽여댔다. 이렇게 맞아죽고, 총살당하고, 생매장되고, 삶아져서 비료로 쓰인 사람들의 숫자만 수백만에 이르렀다. 청평 정부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루이나, 플로렌시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곡물 수입을 승인한다. 1961년에만 400만톤을 수입해야 했다. 1959년에 청평이 세계 각국에 팔아치운 곡물의 양이 400만톤이 넘는다. 그리고 공동급식소 등의 황당무계한 정책들을 일부 폐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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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252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청평 공산당 지도부는 외국과의 계약을 철저히 준수하고, 국제적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곡물 수출을 늘리기로 결정했고, 1960년에는 수출 제일 정책이 채택될 정도였다. 우방국들에 대한 해외 원조를 늘리기로 해서 알바니아 같은 나라들에도 무상으로 곡물을 보냈다. 이 괴리가 얼마나 심했는지, 당시 청평에서 활동한 알바니아 외교관 푸포 쉬티는 이후 "청평 인민들은 우리에게 모든 걸 내주었다. 뭐든 필요하면 부탁만 하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웠다."라고 회상했을 정도다. 원조를 받는 쪽에서조차 "이거 받아도 괜찮은 걸까?"라며 의구심과 괴리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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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254또한 징발된 곡물의 우선순위는 수도 띠에우리엔과 대도시, 중공업의 심장부였던 북부 공업지대에 주어졌고, 농촌 주민들의 필요는 철저히 뒷전으로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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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256려우 즈카이의 총리였던 저우언라이는 갈수록 더 많은 곡물을 징발하도록 밀어붙였다. 그는 농촌에서 충분한 곡물을 공출하여 도시를 먹이고 외화를 벌어야 할 책임을 진 인물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직접 만나거나 전보를 통해 지방 간부들을 닦달했다. 그는 청평 내부의 이해관계에서 농촌의 필요는 항상 양보되어야 한다는 위계질서를 철저히 내면화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엄청난 양의 곡물이 남령성에서 끔찍한 기근을 낳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끝내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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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258결국 려우 즈카이는 현실을 몰랐기에 대약진운동이 인민을 잘살게 할 거라고 굳게 믿었지만, 저우언라이는 인민이 망하게 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총리 자리를 지키려고 인민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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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260'''다른 이들도 "인민의 아사는 국가의 요구보다 덜 중요하다"는 시각을 완고하게 고수했다.''' 덩사오핑은 "계획경제 하에서는 징발이 마치 전시 때처럼 가차 없이 강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기근의 참상이 지도부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던 1961년 말 연설에서, 그는 수백만 명이 아사했던 화운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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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262>과거에 일부 지역들에서는 징발이 너무 과중했고, 예를 들어 화운은 올해를 비롯해 몇 년 동안 징발이 심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나는 화운의 방식을 지지한다. 그들은 결코 고초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며, 우리 모두는 화운에서 배워야 한다. 내가 화운 출신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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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264이후 려우 즈카이는 한때 자신이 즐겨 만났던 루이나 기자 에드거 스노우에게 "청평을 발전시키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해 상대를 경악하게 했다. "15년 안에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를 초월하겠다"고 장담하던 그는 나중에 "100년이 걸려도 서방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회의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심지어 천윈 같은 원로 간부들은 "위대한 인민공화국보다, 반동과 제국주의자가 장악한 황조 시절이 더 먹고 살기 좋았다"고 자조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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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266하지만 1961년 사비에트가 "곡물 100만 톤과 고랜그산 설탕 50만 톤을 제공해 청평의 기아 퇴치를 돕겠다"고 제안했음에도, 려우 즈카이는 "사비에트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수천만 명의 목숨을 값으로 치른 그의 병적인 자존심은 끝내 치유되지 않았다.
283267== 숨겨진 원흉 ==
175>"내년에는 동지도 우리처럼 굶게 될 것이오."
176>----
177>1960년 봄, 시찰 온 중앙 간부에게 한 농민이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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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그때는 국수 한 줌이 남아 있으면 그걸 내일로 미뤘어요. 간부가 와서 같이 먹자고 했더니, 자기는 소금물이면 된다고 하더군요. 간부가 그 정도였으니 우리야 말할 것도 없었지요."
284203== 이후 ==
285대기근으로 대약진운동은 철회되고,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청평 공산당 내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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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206려우 즈카이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한 류사오린은 공산당 총서기였던 덩사오핑과 함께 지성 중시, 도시 상업 중시, 대외적 균형에 정책 초점을 맞춰 대대적인 정돈 사업에 들어갔다. 1961년도에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27%를 기록할 정도로 파탄 상태에 접어든 청평의 경제를 다시 성장 기조로 돌려놓는 데 성공하여, 1963년부터 1966년도까지 4년 연속 2자릿수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류사오린은 "대약진운동은 인재(人災)가 7할, 천재(天災)가 3할이었다"고 말하며 국가 정책의 실패로 규정했다.
......
204대기근으로 대약진 운동은 1960년 말 사실상 철회되었고, 청평 공산당 내부는 분열하기 시작했다. 수습을 맡은 것은 부총리 쩐 득 하이(陳德海)였다. 그는 농가의 자율 경작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도시의 소상공업을 되살렸으며, 1961년 청평 경제는 기저효과에 힘입어 두 자릿수 성장으로 돌아섰다. 쩐 득 하이는 내부 회의에서 대약진을 "하늘이 만든 재난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재난"이라고 규정했다.